강 바람 2008. 4. 23. 16:58

오카리나   

 

목계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전문)

 

 

이 시를 소개한 책에서 목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배경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없었는데  

한창 일에 묻혀 살던 시절이라 그렁저렁 잊고 있던 차에

지난 주, 남도의 봄이 중원을 거칠 무렵 봄따라 나섰다가

우연찮게 목계에 숙소를 정하게 되어 얼마나 설레던지...

 

전날 먹은 게 과해서인지

어둠도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에

대충 눈꼽만 떼고는 부산하게 둑방에 올랐다. 

넓은 강과 긴 다리와 아련히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한폭의 그림 같은데

팔 벌리고 깊게 들여 마신 익지 않은 찬 공기가

잡술로 먹먹해진 가슴을 술국 대신 싸~하게 훑어 내린다. 

맑은 하늘때문에 더욱 높아 보이는 교회첨탑 그 옆에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낡은 방앗간이 초라하게 서 있는데 

부석부석한 살점에 달라 붙은 마른 담쟁이 뼈마디가 

삭은 세월처럼 엉켜 싸~한 가슴에 시리게 다가온다

 

 

왁자지껄한 장터의 활기 대신

체념인 듯 서러움인 듯한  

결코 편치 않았을 삶의 편린들이 오히려

잔잔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다가온 <목계장터>는

내게 목계라는 지명을 오래 기억하게 하였으니, 그것은

그 삶들이 그러함에도 

외침도 통곡도 없고, 원망도 눈 흘김도 없이 

서러운 그것들을 가감없이 전해준 시인의 진솔함 때문은 아니었을지... 

 

 

그 목계나루가 이곳이로구나...

예전엔, 내륙항 중에서 그 규모가 으뜸이었다하지만

한달음에 다다른 나룻배는 

높다란 돛대와 구부정한 노 한 자루를 얹은 채

말뚝 하나, 로프 한가닥에 화석처럼 묶여 있을 뿐이니 

목계교에다가 목계대교까지 생겨

더더욱 하릴없는 나루는 어느새 섬이 되고 

 

 

돛대는 솟대가 되고

뱃전은 그들의 쉼터가 되었으니 

 

황포에 바람 싣고 강심을 헤쳐야할 당당함은

쓸모 없음으로 인한 고려장인 듯

손 묶이고, 발 묶인 채 모래톱에 턱 괴고

유리관의 전시물처럼 유배 되어 찌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세월에 묶여 있었다.

 

 

이 넓은 강폭과 저 높은 둑방으로 짐작컨데 

아마도 큰 물이 마을을 덮쳤으리라.

그래서 민물새우가 토방 툇마루까지 끓어 넘치지 않았을까...

 

 

이 고목은 보았겠지.

목계장터가 얼마나 큰 장이었는지...

이 나루가 얼마나 넓고 번창했는지...

강물이 넘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울었는지...

어쩌면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를 봤는지도 모르고

 

 

산의 당부대로 들꽃이 되었다고

어찌 지난한 삶의 흔적을 지울 수 있으랴

차마 시선 거두지 못하는 그 여린 가슴에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음은 비단 새벽이어서가 아닐 것이다.

 

 

바람에 누운 풀의 화석인지

잡초 깨우다 멈춘 바람의 화석인지

바람 속에서 태어나고

바람 속에서 시든 풀들이

반쯤 누운 채 바람처럼 서 있는 그 옆에

 

 

타다만 별신제 줄다리기 흔적이 음산하게 누웠다.

무엇을 빌었을까?

바람 가득한 황포돛대를 기원했을까?

대운하 어쩌구 하니

옛 영화는 제쳐두고라도 그것만은 막아달라 빌었을까?...

 

 

돌아서며 다시 본 그곳은

여전히 시린 삶들이 조곤거리고 있었으니

한 시인의 아름다운 시어로 해서

그저 평범했을 목계나루는

이른 아침, 참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 주었다.

 

 

시인이 말했듯이

그냥 그렇게 바람이나 되고

그냥 그렇게 잔돌이나 됐으면 싶은데

저 녀석들이 저렇듯 불안해 하니

쉰내 폴폴나는 이몸은 이룰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랬다.

나도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고 싶다만

욕심 끌어안고 뒹구는 인사에게 그런 호사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여지껏 그랬듯이

적당히 욕심도 부리고 적당히 눈도 흘기면서 그렇게 사련다.

살다보면 언젠가는

한 이레쯤은 천치로 변해볼 수 있으려니 하며...

 

돌아서는 목덜미에 강바람이 스쳐간다.

 

-08.04.24 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