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작은이야기

겨울앓이 그 끝에서...

강 바람 2011. 3. 16. 15:22

 

참 별난 겨울이었다.

연필 찾으러 갔다가 지우게 놓고 오고

사포 찾아오면 그라인더가 안 보이고

잃어버린 장갑 한쪽을 왼손에서 찾고

금방 쓴 송곳을 주머니에서 발견하고

통화하면서 전화기를 찾고

아침에 들은 말을 오후에 다시 묻기도 하니

너도 나이 먹어보라던 어른의 말씀도

업은 아이 삼년 찾는다는 말도 이해가 됐다.

 

 

그게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었지만

그 정도가 유독 심하다 보니

만사가 귀찮고 뭘 생각하려도 멍하기만 해서

머릿속이 하얗다는 말의 의미도 체험했다.

 

 

몸살 후유증이려니 했는데

말 한마디 듣는 것도 민감하고

말 한마디 하는것도 조심스러지기에 

어쩌면 세월 탓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었는데

엊그제 티비를 보다가 눈치 챘다.

아, 맞아!

이게 저 사람들이 말하는 우울증인지도 몰라.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에고~ 이건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비록, 활달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집착하는 성격도 아니고...

걱정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코 빠트리고 끙끙거리는 것도 아니고...

가끔, 아내에게 잔소리도 듣지만

마눌님 잔소리야 몇십년 들으며 사는데... 설마? 하며 억지로 부인하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추운 겨울 그 끝에는 어김없이 봄이 오고

나흘 만에 다시 찾은 그곳엔

어느새 꽃이 피고 벌의 몸짓이 분주하다.

 

 

황량하던 창고 곁에 노란 복수초가 눈부시고

하우스 밖 양지 녘엔 주름꽃이 앙증맞다.

 

 

매화나무엔

겨울을 견뎌온 꽃눈들이 조롱조롱한데

성급한 녀석들은 꽃을 피워 벌을 기다리고

 

 

지난가을부터

그 모습 그대로 찬바람 눈서리를 맞던 목련도 곧 필 눈치다.

이들인들 겨울이 편하기만 했으랴.

 

 

무엇이었던가.

나의 게으름이 어디서 왔던가.

무기력은 또 어디서 왔던가.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지만

가라앉는지도 모른 체 스스로를 더 깊이 파묻었으니

그게 어디 세월 탓이랴.

그게 어디 몸살 탓이랴.

느긋하게 살리라 했지만,

부족한대로 살자 했지만,

좀 더 넓혀 생각하자 했지만,

내속의 나는 그게 아니었나보다.

 

 

하지만 참 다행이다.

가라앉음을 알았으니 다행이고

속내 털어 놓을 곳 있어 다행이고

팔 뻗으면 잡아 줄 손 있음이 다행이니

이쯤에서 유별난 겨울앓이는 봄바람에 흩뿌려본다.

겨우내 앓던 몸살을 하루 아침에 털어버릴 수는 없겠지만...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어디서 전자음이 삐삐 울린다.

고등어 데우려고 전자렌지에 넣었는데 또 깜빡한 거다.

쉬 고쳐질 일은 아닌듯하니 어쩌랴.

피식 웃으며 커피 한 잔 들고 밖을 내다보니

유난히 붉은 동백꽃 너머

초등학교에 내려 앉은 오후 햇살이 화사하다.

으랏찻차~~

한껏 뻗은 기지개에 사지가 늘어진다.

봄이다...^^

 

-11.03.16 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