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바람 2011. 10. 29. 18:14

 내가 만일   

처진 줄기 끝에 꽃이 피었다.

곧추세운 허리가 곡예사의 몸짓처럼 당차고 아린데

화사한 햇살이

보라색 갈빗살에 반사되어 하얗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 햇살이 게으른 몸을 부추긴다.

 

 

똑딱이 한들거리며 강변을 걷노라니

기운 오후의 가을볕은

유난히도 뜨겁던 지난여름의 그 볕이 아니었다.

게으른 자의 위장용 모자는 벗어 들고

온몸으로 그 햇살 받는다.

 

 

넓은 코스모스 밭엔 앙상한 잡초 줄기만 가득하고

정작 밭주인인 코스모스는 드문드문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 동안 와보지 못한 사이에

구청에서 가을정리를 해버렸나 본데

에고~ 성질 급한 양반들...쪼매만 더 두지 않고...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은 강되어 흐르고

그늘을 배경으로 선 들꽃이 눈부시게 하늘거렸다.

언제나 느릿느릿한 나와 달리

앞선 아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예전엔 조용히 뒤따르던 그녀가

언제부턴가 나란히 걷다가

또 언제부턴가는 앞서서 기다리기도 했는데

그녀가 빨라서가아니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내 발걸음이 느린 탓이고

느려서 느린 것이이기 보다

한 눈 파느라 늦다는 걸 알기 때문이며

기다리며 재촉해도 그 버릇 못 고침도 알기에

이즘엔 아예

쉴 자리거나 목적지에서만 기다린다.

 

 

집 나서서 오른쪽은 강의 상류로

실개천과 낮은 산과 수양버들과 들꽃과 억새가 있는 길이고

 

 

왼쪽은 바다와 맞닿은 강의 끝인데

넓은 강과 바다와 광안대교와 영화의전당이 있는 길이다.

 

 

양쪽 모두 십리거리에

상류 길은 아기자기해서 좋고

하류 길은 확 트인 시원함이 좋다.

나는 상류를 좋아하고

아내는 하류를 좋아해서

하루는 오른쪽, 또 하루는 왼쪽으로 걷는다.

아내는 운동이 목적이고

나는 기웃거림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린 그렇게 다르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40여 년을 함께 살았으니

어쩌면 그 다름이 함께할 수 있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햇살을 본다.

풀숲에 쪼그려 앉은 작은 어깨와

가을 색으로 물든 강아지풀 속살과 

잔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하얀 그리움에 쏟아지는 햇살을 본다.

 

 

그늘에 가려지면

화사한 밝음이 그를 돋보이게 하고

 

 

밝은 녀석들은

그늘이 있어 더욱 빛나기도 하니

 

 

이들이 이렇듯 곱게 보이는 것은

서로 보듬은 그 어울림이 따뜻해서인지도 모르겠다.

 

 

한적한 강가에 앉았다.

따뜻한 보온병과

종이컵 두 개와

봉지커피 두 개와

길가에서 사온 붕어빵 세 마리...

낚시꾼은 강심에 머물고

나는 낚시꾼 등에 머물고...

 

 

얼핏

강물이 푸르게 보이지만

강물이 맑아서 푸른 게 아니라

하늘이 내려 앉아 푸르게 하였으니 

물 없으면 하늘이 어찌 앉을 것이며

하늘이 푸르지 않으면 강색이 어찌 저토록 짙푸를까.

 

 

가늘고 투명한 낚싯줄이 반짝이고 있으니

그것은 낚싯줄이기보다는 햇살이겠고

 

 

붉게 물들어 가는 햇살따라

억새의 볼에도 홍조가 피어나니

이 역시 억새가 아니라 노을이려니

 

 

  

억새가 흰 것은

희어서 흰 것이 아니라

햇살이 밝아서 희다는 걸 알았고

그늘이 있기에  밝은 것이 더욱 빛날 수 있었으니

세상사

저 홀로 잘난 건 하나도 없나보다.

  

 

어디, 그들만 그러하랴.

나도

누구누구의 빛으로 살았고

빛은 빚이 되어 쌓였음에도

누군가의 빛이 돼본 적 없으니

산더미 같은 이 빚을 어이할지...

눈 시리던 해는

종일 밝게 비춰주고도

생색 한 마디 없이 사라졌다. 

범종의 울림같은 긴 여운을 남기고 산넘어 갔다.

나도 그렇게

울림이고 싶고

여운이고 싶지만...글쎄...

 

앞선 아내의 꼭뒤가 가로등 아래 가물가물하다.

 

-11.10.28 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