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작은이야기

그녀의 고향

강 바람 2012. 9. 1. 20:03

 

6시에 일어났다.

꼬불꼬불한 산길운전으로 좀 피곤했지만

해뜨면 바로 뜨거워지는지라 일찍 일어 난거다.

예초기 분해해서 싣고

낫도 두 가리 챙기고

여분의 연료도 싣고 아내와 단둘이 나섰다.

처갓집 성묘를 진두지휘하시던 매형은

어느새 여든넷의 노인이 되셨으니 세월 비켜갈 장사는 없나보다.

나는 예초기 돌리고

아내는 갈퀴로 긁어내고...

무덤가에 발갛게 익은 해당화를

쳐 내야 할지 그냥 둬야할지 고민 아닌 고민도 하고...

그러구러 허리 펴니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 있었다.

부랴부랴 돌아와

등짝에 달라붙은 땀 등목으로 씻어낸 뒤 늦은 아침을 해결하고

점심까지 먹고 가라는 누님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길을 나섰다.

 

 

동해휴게소에 들렸다.

망상해수욕장 뒤 언덕에 있는 휴게소라

출발지에서 겨우 십리 남짓의 가까운 곳이지만

그냥 그곳에서 전체를 조망해보고 싶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고

바다와 백사장이 만나고

백사장과 송림이 만나고

송림과 철길이 만나고

철길과 7번국도가 만나고

국도와 고속도로가 만나는 곳...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남다른 풍경이다.

 

 

                                                                                                                    40년 전 망상해수욕장에서...

쉰아홉 해 전

저기 저 망상국민학교에 입학했었지.

6.25 동란으로 3년 늦게 입학하는 막내 누나와 함께..

철길 따라 오가던 5리 남짓 등굣길...

이맘때면 

해당화가 지천이던 기찻길 옆 백사장...

달고 말랑하던 그 열매...

겨우, 두 해 다닌 학교지만 쉬 잊히지 않는 풍경인데

울창하던 송림은 형형색색의 낯선 시설로 바뀌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넓다던 백사장은 바다로 내몰려

금방이라도 푸른 동해에 잠길 것만 같다.

저 곳을 붉게 물들였던 해당화는 그 자리에 있을까?

내겐 그리움이고

그들에겐 삶인 그곳... 낯설다.

'고마, 가자...'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매년 올 때마다 유년의 추억 찾아 고향마을을 서성이다 보니

아내의 어릴 적 고향은 그냥 지나치곤 했었는데

그날따라 지나가는 말처럼 웅얼거리는 그녀의 말 속에

'죽변'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내가 내 교향을 품고 있듯이 그녀도 유년의 고향을 품고 있겠지.

그래 이번엔 당신 고향이다, 가자...

그녀는 아홉 살까지 살았던 유년의 추억을,

나는 맛있는 오징어 물회를 꿈꾸며...

 

 

바닷가 산위의 죽변등대로 향했다.

이 일대가 드라마 촬영지란다.

1박 2일 팀도 다녀갔단다.

그래서 그런지 길은 잘 정비돼 있고

주차장, 화장실, 안내판에 들인 정성이 엿보인다.

관광 안내도 앞에 선 그녀는

벌써 아홉 살 그때를 훑고 있다.

"이 길 넘으면 학교 가는 길이고

  가다가 이쪽으로 가면 내 살던 집이고

  요 아래 여기 쯤 외할머니 댁인데..."

말끝을 흐린다.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외삼촌도 돌아가셨으니

아홉 살 소녀의 기억에 남아있던

고향의 유일한 두 분이 안 계신 고향...

 

 

가까운 곳에 드라마 촬영장이 있다.

드라마 제목이 '폭풍속으로...'란다.

깎아지른 절벽에 빛바랜 건물이 있었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위치 하나는 속된말로 끝내준다.

어떻게 저런 곳이 아직 남아있었을까?

 

 

남쪽으로 죽변등대가 새로 단장돼 있고

 

 

북쪽으로는

물놀이 장소로 적당할 자갈해변이 있었다.

해변 모양이 하트 닮아서

사랑이 잘 이루어진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그런지 산책로에 청춘들의 발걸음이 잦다.

 

 

기어이 그 앞에서 한 방 찍겠단다.

완죤 단체관광 모드다. 

 

 

이 곳 해당화는 꽃 모양이 좀 다르다.

향기는 울 고향 보다 더 짙은 것 같고...

 

 

기어이 들어갔다.

바다를 보고 그냥 돌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맑고 따뜻한 물...모나지 않은 몽돌...

버릇처럼 물속을 기웃거렸지만

여름 끝물이라 뭐 남아 있을 리 없지.

잡아봐야 들고 올 것도 아니지만 뭔가 허전하다.

수십 년의 버릇인가보다.

 

 

"가자, 배고프다..."

 

우물이 있다.

바가지로 퍼 올리는 게 재미있나보다.

손 씻고 버리고 또 퍼 올리더니 날더러 씻으란다.

"소금기 씻지요?"

"됐다, 일년만에 적신 바닷물인데 집에 가서 씻을란다."

내 맘 알았나보다. 씩 웃고 만다.

 

 

어릴 땐 온통 대나무였단다.

바닷가로도 다닐 수 있었단다.

단골 소풍지였단다.

저 건너 민박집 쪽엔 길도 없었단다.

 

 

대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걸었다.

걷는 내내 아내는 종알거렸다.

"그래그래 " 맞장구 쳐주니 끝이 없다.

 

 

좋긴 좋은가보다.

얼라 같은 저 표정이 지금 그녀의 마음이겠지.

아니면 아홉 살로 착각했거나...

내년에 또 오자고 했다.

쌍둥이들캉 같이 오자고도 했다.

 

 

자...이젠 내 차례다.

바닷가 방파제 옆에 있는 횟집을 찾았다.

"오징어 물회 됩니까?"

확인하고 들어갔다. 들어갔다가 없다면 낭패니까...

이거..

한 달 전부터 해달라고 조르던 건데...

동네에선 이런 물 좋은 넘 찾을 수 없었는데...

군침이 돈다. 

간을 보니 딱 좋다.

 

 

"소주 한 병요~"

아내의 주문이 호기롭다.

영감 운전하니 웬만하면 참을 긴데

고향이라는 게...바다라는 게...물회라는 게...

소주를 부르게 했나보다.

그래, 당신 혼자라도 한 잔 하셔~

내가 술 좋아했더라면

한 잠 자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못 참았겠지?

겨우 두잔 마시고 일어났다.

돌아오는 길 내내

"자나?"

"아니..."

"자나?"

"내가 뭐 취한 줄 알아요?"

그럭저럭 도착했다.

꾸벅꾸벅 졸더라는 말은 안 했다.

 

죽변...

반겨줄 사람 하나 없어도 

언제나 아홉 살 소녀의 고향인 것을...

아참...마지막 사진은 소문내지 말라캤는데...^^

 

-12.09.01 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