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바람 2006. 10. 23. 18:21


며칠째 속이 좋잖아 
끙끙거리며 핏기 없이 늘어져 있는데
사위가 와서 바람이나 쐬러 가잡니다.
나가는 것조차 귀찮았지만
일부러 시간 내서 청하는 일인데 
무시하기도 그렇고 해서 따라 나섰더니
오늘도 바닷가로 길을 잡네요.
길가 조개구이 집에 앉아 술 한 잔 하는데
평소엔 낮에 잘 먹지 않았지만
체증이 내려가지 않아 거북한 참이라
술 한잔하면 혹시 내려갈려나 싶어서 한잔하는데
“김서방, 이것 먹어보시게...”
“김서방, 이것 맛있네...”
집사람이 사위에게 하는 양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장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이거 원...장모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농처럼 한마디 던지고 어슬렁거리는데
가게 앞 통나무 구유에 채송화가 가득 피어있더군요.
쪼그리고 앉아 사진 몇 장 찍는데 
장모님 떠올랐습니다.

울타리대신 
벽돌 한 장으로 경계 지어진 화단에는 
그 가장자리를 따라 
키 작은 채송화가 만발했었는데
각양각색의 그 많은 꽃들 중에
기억나는 건 오로지 채송화뿐이고 
햇살 좋은 여름날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던 그 작은 꽃들은
삼십년을 훌쩍 넘은 지금도 어제인양 한데
앙증맞은 채송화와 함께 장모님 생각이 났으니...

말없이 참 조용하셨지요. 
처음, 장모님의 그런 모습에서 
무척 깐깐하리라 지레 겁먹었었는데
무뚝뚝하거나 깐깐해서가 아니라
수줍어하셨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게...
뭐랄까...
마흔여섯 젊은(?) 나이에 딸 시집보내는 
당신의 심정도 좀은 착잡했을 테고
사위 대하기도 참 껄끄러웠겠지요. 
맏사위라 경험도 없으셨으니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고심하셨을 테지요.

그런 연유로 
그냥 빙그레 웃으시고 
말은 가급적 짧게
말끝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장모님의 마음이,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을 장모님 입장이 재미있어서
능구렁이 사위는 짓궂게도
장모님, 장모님....하며 따라다녔고 
대답 못하시고 슬슬 피해가시는 그 모습이 
어찌 그리도 순진해 보이던지 
부끄러움 많은 우리 큰 누나 같았지요.
그 모습이
화단에 핀 채송화 같다는 생각을 얼핏 했었는데 
그 느낌이 이렇듯 오래 각인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흔 일곱에 할머니가 되시어
사위 볼 때보다 더 곤혹스러웠을 장모님.
외손녀 재롱에 재미 들고 
그제야 편하게 딸네 집 드나드실 무렵
딸은 천리타향 부산으로 떠나버리고 
일년에 고작 서너 번 나그네처럼 오갔음에
백년손님 같은 사위를 여전히 어려워하시더니
쉰여섯쯤에야 겨우 그 어려움도 수줍음도 걷히시고
예순여섯 쯤엔 
능글맞은 맏사위의 짓궂은 농담도 맞장구 쳐 주시는
참 편안한 장모님과 사위였더니
제대로 모셔보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세월가고
일흔아홉 좋은 시절에 
세상여행 마치고 오신 길로 가셨습니다.

편안했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데요.
떠나시는 모습도 편안하셨지만
배웅하는 사위의 마음도 편했지요.
병마에 지친 당신의 고통을
티끌만큼도 덜어드릴 수 없었던 사위는
고통에서 벗어나신 당신의 마지막 모습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는데,
배웅하고 난 뒤, 그때 알았지요.
죄스럽게도, 당신의 고통을 안쓰러워하였기보다
그 모습 지켜보는 내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났음을 안도하였고
그로해서 편안하게 여겼음을...

바람에 실어 훨훨 보내드리고
장모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본,
주머니마다에 들어있는 사탕과 초콜릿.
비상약으로 넣어두신 그 단것들이
병마와 싸우신 흔적을 보는 듯하여
그제야 눈물이 비집고 나왔었습니다.
단것을 입에 넣으시고도 소태맛이었을 그 마음을 보는 듯하여
끝내 창밖을 내다봐야 했지요.

채송화를 처음 만났던 옛 처가는 
길이 돼버린 지 이미 오래고
그 꽃 키우던 장모님께서도 오신 길로 가셨지만
서른 세 해, 짧지 않은 세월을
장모와 사위의 인연으로 살았음에 감사하고
제게 있어 장모님은
키 작은 채송화와 함께 
수줍음 많은 젊은 모습으로 남아계십니다.
세월 따라 자꾸 잊혀지겠지만 
부디,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들만이라도 
오래오래 잊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바라며
돌아오는 내내 
카메라에 담긴 채송화를 들여다봤습니다.
작은 화면 속에서 
채송화처럼 수줍게 웃고 계신 듯 했습니다.
어때요? 
우리 장모님 참 고우셨겠지요?...^_^
-06.07.24 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