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방문·만남
일요일만 되면 그냥 좀이 쑤시고 안 나가면 괜히 손해 보는 것 같고 심지어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불쑥 솟기도 하니 병인지... 가는 세월에 대한 아쉬움인지... 새로운 인연에 대한 설렘과 나와 다른 삶을 엿볼 욕심으로 가랑거리는 이슬비 맞으며 찾은 둔치도. 묻고 물어도 돌고 돌아도 헷갈리는 길. 어찌어찌 입구에 다다르니 누군가 마중을 나오는데 흠~ 생김새를 보니 사진으로 한번 본 얼굴이다. 아니 모습이라 해야겠지... 초면이지만 그도 나도 대충 눈이 맞는다. 우째 초면 같질 않다. 수염과 긴 머리로 위장했지만 눈가에 개구쟁이의 호기심이 꿈틀거린다. 강바람님? 분디미님? 그렇게 첫 만남은 차창 너머로 대충 했지만 참 희한한 세상! 작은 모니터에서 알게 된 인연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그냥 편하다. 그렇게 간 둔치도 나무가마터! 삼십년 살면서도 처음 가본 그곳은 넓은 강을 사이에 두고 세월이 가둔 섬 아닌 섬으로 살고 있었는데 차림세로는 분디미님이 도예하시는 줄 알았더니 선생님은 따로 계시 단다. 유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는데 수줍은 표정과 포근한 미소와 정감 실린 눈매가 십년지기인양 하고 작업하던 손이라고 망설이시는 그 손을 잡으면서 적잖은 세월 속에서도 여직 그런 표정을 간직하고계신 모습이 얼마나 부럽던지... 기둥에 묻은 세월과 굳이 치장하지 않아도 좋은 흙벽과 역시 흙으로 빚은 각양각색의 그릇들과 무심히 모여 앉은 그 옹기종기한 정경이 문득, 그리움처럼 다가든다. 기둥 발치에 기대어 먼 하늘 바라보는 이 녀석. 잘 태어났더라면 애지중지 호강했으련만 어쩌다 비바람에 내몰린 채 내일을 알 수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 가슴엔 빗물이 눈물처럼 고이고 삭풍이 작은 가슴을 휘돌아 나가는 듯하다. 하지만 네 주인 원망 말거라. 나야 흙도 모르고 불도 모르지만 버리는 마음도 사랑이려니 여기렴. 모르지, 널 버린 그 가슴도 하늘을 품기 위해 울고 있는지도... 너도 하늘을 담아보렴. 빗물을 담을 수 있다면 하늘도 담을 수 있을 거야. 아직도 털어버리지 못한 줄기는 무슨 미련이 그리 많아 새끼 품은 채 창문 앞에 턱 괴고 그렇게 서있다. 허긴, 버릴 때 버리지 못한 불편한 그 속 모르리. 나도 버려야할 때 버리지 못한 찌꺼기가 있음에... 공방으로 안내되어 들어섰더니 손작업으로 뭔가를 빚으시던 안주인께서 반겨주신다. 역시 도예하시는 선생님이시란다. 연탄난로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는데 건네시는 차가 귀하디귀한 겨우살이란다. 거시기에도 좋고 머시기에도 좋단다. 남의 몸에 뿌리 내리고 기생하는 그 삶 때문에 더러 욕먹기도 하는가 보더라만 그것은 그것대로 그의 삶이고 그로 인해 다른 생이 이로움을 얻고 있으니 따질 일 뭐겠는가. 겨울잠에라도 들었는지 창 밖에는 이불 뒤집어 쓴 가마가 누런 들판을 배경으로 편안하게 누워있고 선반엔 가마가 품어주길 기다리는 작품들이 가지런히 때를 기다리는데 빛을 얻은 작품이 저마다의 색으로 편안하게, 그리고 고고하게 인연을 기다리고 있다. 아는 게 없으니 입만 쩍 벌리고 바라보는데 참 대단하다는 생각 외에는 뭐라 표현할 수 없다. 누가 이들을 흙이라 말하겠는가. 누가 이들을 불이 빚은 색이라 말하겠는가. 내 눈엔 흙도 불도 아닌 혼이었다. "이래 누워 있으몬 우야노? 퍼떡 인나거라." 가마 주변도 어슬렁거리고 잘 생긴 경비병이랑 눈도 맞춰보고 한 겨울에도 파릇파릇 살아있는 조릿대도 툭툭 건드려보며 여기 저기 둘러보다가 전시실로 안내되었는데 이 역시 뭐라 토를 달 수 없다. 사람의 손길이라곤 믿기지 않을 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소와 겸손한 자태에 그윽한 시선과 추함도 악함도 모두 끌어안을 듯한 한 없이 깊은 자비의 모습들. 흙의 미소인지 불의 미소인지 만든 이의 미소인지.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니 내 살아옴이 선하지 못했음에 부끄럽다. 뽐내지 않는 소박한 차실에 앉아 차도 마시고 사는 이야기로 정담도 나누고 멀거니 바깥 풍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아랫목에 누워 온몸으로 따뜻한 열기도 받고 라면에 잘 익은 김치로 밥도 묵고 그렇게 신선 같은 시간을 보냈다. 딸내미의 성화로 먼저 가셨던 분디미님과 양산에서 만나기로 하고 유선생님과 동행하여 둔치도를 나섰다. 얼굴 가득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신 예림님의 배웅을 받으며 둔치도의 나무가마를 떠나는데 잠시 멈췄는가 싶었던 빗방울이 조만강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담고 배속에 넣고 그도 모자라 들고 오기까지 했으니 이렇게 빚지고 언제 다 갚을 수 있으려는지요. 두 분의 마음으로 데워진 가슴이 아직 따뜻합니다. 다시 뵐 날을 기다립니다. -06.01.18 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