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작은이야기

42번 국도에서

강 바람 2012. 8. 27. 16:13

정모 끝내고 돌아오던 날

집으로 가는 대신 강원도로 향했다.

표면적 목적은 성묘였지만 속셈은 고향 나들이고

그보다 더 큰 목적은 아내와의 느긋한 여행이었다.

일부러 나서려면 이게 걸리고 저게 걸려서 쉬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비 아가씨에게 물으면 고속도로를 추천할 테고

그렇게 가면 빠르긴 하지만 그게 썩 내키지는 않는다.

이유야 뭐 다들 아실 테고...

 

충주, 제천, 영월을 거쳐 정선 임계까지

고개마다 비도 맞고 구비마다 바람도 맞으며

낯선 민둥산 고갯길을 기어오르는 것은

그 길가에 내 아는 사람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두 송이 나리가 마주보고 선 곳...

42번 국도변에 있는 공예가님 댁이다.

아무도 없다.

넓은 오가피 밭 사이로 토종닭이 분주하고

여기저기 경비견들이 몸부림치며 짖는다.  

 

오래전 어느 겨울

사이버에서의 티끌만한 인연을 핑계로

부산에서 천리 길인 이곳을 찾았을 때

또 다른 인연들이

눈발 성성한 밤의 산길을 달려와 어울렸던 곳이니

멀고 험한 길 돌고 돌아 찾는 것은

자꾸 멀어져가는 그 추억을 다잡고 싶은 소박한 바람은 아니었을지...

 

 

볼일 있어 나갔을 텐데 방해되지 않을까 싶어

전화를 해야 할지 말지 망설여졌지만

쉬 올 수 있는 길도 아니고 본지도 오래 됐으니

아무래도 그냥 가면 더 후회할 것 같아 연락했더니

부부가 득달같이 달려 왔다. 성당에 있었단다.

 

많이 변해 있었다.

넓은 배추밭은 콩밭이 되었고.

오가피나무는 굵어져 숲을 이뤘고

새로 꾸민 전시장엔 작품이 가득하다.

화단엔 못 보던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고

처음 인연의 시작이었던 정자는 여전히 시원했다.

 

직접 기른 작물로 즙을 낸 건강음료 한 잔 하고

해지기 전에 백봉령 넘어야겠기에 일어서는데

범의꼬리 한 삽을 떠 주며 집에 가서 심어 보란다.

닭백숙에 좋다며 마른 오가피나무도 건넨다.

약이라면서 내민 마른나물 봉지도 받았다.

내 딴엔 인연이라고...추억이라고 불쑥 찾아들지만

그렇게 또 신세를 지고 말았다.

 

돌아서며 힐끗 본 두 사람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다.

어디 그들뿐이랴.

쉰 막바지에 맺은 인연이 일흔에 가까웠으니 

돌아선 내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래, 세월이려니...

그래, 추억이려니...

그래서 더 아린 인연이려니... 

 

백봉령 600고지를 숨 가쁘게 넘어 옥계에 도착하니

갓 넘어온 자병산엔 어느새 짙은 그림자가 스며있었다.

공예가님, 선녀님 고맙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이소...^^

 

-12.08.27 강바람-

'바람소리 > 작은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돋보기  (0) 2012.09.06
그녀의 고향  (0) 2012.09.01
간만에 병원갔더니...  (0) 2012.07.30
뻐꾸기 우는 사연  (0) 2012.07.02
빈자리  (0) 2012.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