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로 인하여 장산초등학교 휴교하오니...."
'엥?? 웬 폭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관리실 안내방송에
튕겨나듯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학교 옥상 너머로 앞산이 하얗더군요.
'햐~ 밸일이네, 이거 얼마만이고... 한 겨울에도 보기 힘든 눈인데...'
강원도 출신이다보니
처음엔 부산 눈촌사람들한테 뻥 많이 쳤지요.
마루까지 눈이 들이쳐서 자고 나면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느니
눈 내리기 시작하면 화장실과 마루 사이에 새끼줄을 연결해 놨다가
다음 날 아침에 마루에서 새끼줄을 뱅뱅 돌려 눈 터널을 만들어 화장실까지 기어 갔다느니
뒷산에 올라가면 토끼가 뛰지도 못하고 나 잡아 잡수 하고 기다리고 있다느니
바닷물이 얼고 그 위에 눈이 쌓이면 길인지 물인지 분간이 안 갔다느니...
물론, 나중엔 듣는 사람도 말하는 나도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예순 몇 해를 산 내게도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눈으로 해서 일상에 불편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얗게 덮어버린 백색의 풍경은 나를 편하게 한다는 거지요.
서른 한 살에 부산으로 이사와서 서른 네 해를 살았지만
기억 될만한 눈은 겨우 서너번에 불과하니
겨울이면 은근히 눈이 기다려 졌지요.
강원도에선 지겹기까지 하던 눈이 말입니다.
점심 무렵에 건너다 보니
아침에 보던 것 보단 많이 녹았더군요.
조바심 끝에
사진이라도 한 컷 찍으려고 나섰더니
등산로는 이미 질펀하게 녹아버리고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들도 후드득 흩날리기 시작합니다.
등에 흰 눈 두툼하게 입고 선
비탈의 나무들이 참 의연하게들 보입디다.
운동화 바닥이 축축해져 오기에
질펀한 길을 비켜서 눈을 밟고 오르니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 소리와 발바닥에 닫는 감촉이 참 좋습디다.
동백의 붉은 입술에 녹다 얼어 버린 눈(雪)물이 아름답고
막 솟기 시작한 새잎에도 소복하게 쌓인 눈
가지에 매달려 한들거리는 녀석까지 이뿌네요.
느닷없는 춘설이 이들에겐 분명 시련이겠지만
모처럼 만나는 세 계절의 공존풍경을 걷다보니
산 위의 설한풍조차 시원했지요.
'얘들아.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겠지만
살다보면
어처구니 없는 날벼락도 종종 있단다.
하지만
봄이 이미 와 있으니 춘설쯤이야 곧 녹고 말테니
오늘 하룻밤만 잘 견디려무나'
아무리 눈 구경 어려운 아랫녘이고
그 풍경을 얼라처럼 좋아라 하지만
폭설로 교통사고가 줄을 잇고
또 어디에선 갇히기도 했다는데
즐거운 속내를 들어낼 수 없어 혼자 즐겼습니다.
하지만
고운 건 곱고 이뿐 건 이뿌니 어쩝니까.
지난 가을의 안쓰러운 흔적에
살포시 내려 앉은 털모자 같은 눈이 마냥 고운 것을요.
세 시간여 바람되어 휘돌다 내려 오니
아파트 화단에 희끗희끗하던 잔설은 간데없고
이른 꽃 한 송이가 배시시 웃고 있네요.
잠시 왔다 간 백설...
잠시 즐겨본 설경...
그 속에 움트는 봄냄새...
그들로 하여
마른 땅에 단비 적시듯
말라가는 가슴 한켠을 적셨습니다...고맙게요...^_^
-10.03.11 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