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작은이야기

겁보 할매

강 바람 2014. 6. 25. 11:59

Love  

 

우리 집 할매는 겁이 많다.

일상적인 일에는 활달한 편인데

병원에만 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평상시 약간 높은 혈압은

병원 들어서는 순간 심하게 요동치고

혈압측정기 앞에 서면 얼굴까지 상기된다.

그런 할매가

하산 길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는데

끙끙거리는 품이 수상해서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척추에 미세한 금이 가고 약간 찌그러졌단다.

 

 

할매의 표정은 이미 사색이다.

MRI 영상을 보니 심한 건 아닌데

다른데도 아닌 척추라서 신경이 쓰였지만

나마저 걱정하면 할매 더 놀랄 것 같아

잘 하면 수술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했으나

내말에 걱정 접을 할매가 아니니 어쩌랴.

'당신이 겁이 많아 글치

밸로 걱정할 상태는 아닌 것 같으니

겁 묵지 말고 맘 편하게 무라'며

아무래도 당신은

나이 더 먹어야 겁도 작아질 거라며 짐짓 웃었더니

나이 먹으면 더 심해지지

어째서 더 좋아지냐고 따지듯 묻는다.

 

‘글쎄다...

뭐라꼬 설명은 몬하겠지만

내가 살아보이까네 글터라.

많이 살았으니

나머지는 덤이라꼬 생각하는지도 모르지...

그라이까네

세월 가는 거 넘 겁묵지 말고 퍼떡 오라캐라

그런다꼬 세월이

진짜로 빨리 오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라도 맘 느긋하게 묵고 있으몬

나이 묵는 거 밸로 겁나지도 않고

늙는 거도 불안하지 않을끼다.‘

택도 아닌 말로 너스레를 떨었더니 실쭉 웃는다.

정말 그렇게 될지는 나도 모르지만

이왕 나온 립 서비스에

내 몸 팔아서라도 나보다 오래 살게 해주겠노라고

호기롭게 한마디 덧붙였더니

뻔한 거짓말에도 할매의 표정이 금세 밝아진다.

낡고 낡은 이 고물을

돈 내고 거두어갈 사람이 있을 리 없건만..

 

 

다음 날

환자가 겁이 많으니

선생님께서 안심 좀 시켜 주십사고

담당의사에게 부탁을 했더니

아침 회진 때마다 손잡고 걱정 마시라 토닥여 주니

그제야 할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게 입원 2주가 되고

다행히 수술 안 하고 퇴원했다.

할매가 젤 무섭게 여겼던 수술이었는데

병원 나서는 할매의 마음은 얼마나 좋았으랴.

집에 오니 내 일이 많아 졌다.

적어도 두어 달은 안정해야하니

상머슴 노릇할 생각에 앞이 노랗고

할매가 하던 일들이,

40년 해오던 그 일이 참 대단했음을 느낀다.

다른 건 몰라도

반찬은 도저히 자신이 없으니

부득불 반찬코치는 받아야 될 것 같다.

 

저녁 먹고 설거지 하고

음식물 쓰레기 버리고 오니

가슴에 안전장비를 착용한 할매는

병원생활에서 맛들인 연속극에 넋 팔고 있다.

커피 한 잔 타서 느긋이 컴 앞에 앉아

간만에 타자기를 두드려본다.

그동안 휑뎅했던 방안에서

모처럼 느낀 할매의 온기가 그저 고맙다...^^

 

-14.06.24 강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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