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작은이야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봄이면 제일 먼저 기다려지는 제비꽃. 그 작은 꽃 한 송이가 자꾸 보고 싶어지데요. 특별한 사연도 없이 첫눈에 반한 참 이상한 인연인데 기다려지고 보고 있으면 편하고 그러다 불쑥 가련한 생각도 드는 꽃. 보도블록 사이에 담장 틈새에 양지바른 언덕에 삭풍 견딘 뒤 봄바람처럼 소리 없이 피어난 그 모습이 자꾸 보고 싶으니 어쩌면 내 속에 아직 남아있는 오래된 연민을 대신 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지난 일 년간 그와의 동거생활을 돌아봅니다. 2005년 4월 13일 이 그림 기억나시는지요? 작년 이맘때 텃밭에 무더기로 피어났기에 그 보라와 순백의 대견한 자태에 흠뻑 빠져 두 뿌리 얻어 심었는데 2005년 5월 18일 집에온지 며칠되지 않아 꽃은 지고 그렇게 잊고 있는 사이 씨앗 품더니 2005년 5월 24일 그 마저도 훌훌 털어버리고 속절없이 빈껍데기만 덩그렇게 남겨진 그 모습에 생의 모습을 견주어 보기도 했었지요. 2005년 12월 6일 그렇게 여름 가고 가을 버티다가 찬바람이 베란다를 가득 체울 무렵 녀석도 서서히 시들기 시작하더니 2006년 2월 19일 앙상한 뼈만 남기고 갔습니다. 그렇게 가나보다 했지요. 편하다면 참 편한 모습이고 쓸쓸하다면 한없이 쓸쓸한 그런 모습으로요. 그렇게 겨울오고 겨울가고 막연한 기다림 속에 봄이 왔습니다. 2006년 3월 7일 기다림 그 뒤 삭풍도 기세 꺾이고 동창으로 들어온 햇살에 등줄기가 따스해지던 3월 녀석이 새 순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 3월 13일 쑥쑥 솟아오름이 하루가 다르고 2006년 3월 16일 동백꽃이 하나 둘 떨어질 무렵 여기저기 실낱같은 새싹이 힘겹게 싹을 돋우는데 이들이야 분명 작년의 그 씨앗이겠지만 묵은 뿌리에서 올라온 녀석의 정체가 궁금하데요. 작년에 시들었던 그 녀석일까? 아니면 그 녀석의 새끼일까? 그도 아니면 형제일까? 만약 이 녀석이 그 녀석이라면 "사람도 해마다 새롭게 살아봤으면...." 하다가 피식 웃었네요. 2006년 3월 19일 어쨋건...무엇이건... 무럭무럭 자라는 녀석이 기특하고 지난해의 앙상한 뼈마디가 눈에 걸려 마사를 덮어주고 이끼도 듬성듬성 얹어 줬습니다. 2006년 3월 23일 그런데 녀석이 너무 웃자랍니다. 물을 넘 자주 줘서 그런가본데 아무래도 온실속의 멀대가 되지 싶어서 혹시 내 없을 때 화분에 물주더라도 제비꽃에는 주지 말라고 당부를 했지요. 2006년 3월 25일 동백이 물을 좋아해서 매일 주다보니 그 곁에 있는 덕으로 언제나 촉촉하게 젖어있고 그러다보니 하루가 다르게 키만 자랍니다. 줏대 없고 허약한 모습이 싫습디다. 마사가 하얗게 마르면 안쓰럽긴 하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랬는데도 계속 웃자라서 지금은 거짓말 보태서 천정에...^^ 2006년 3월 30일 건너편 화분에서도 낯선 싹이 돋기에 이게 뭐꼬? 그랬는데 잎 모양을 보니 제비꽃 같습니다. 그 옆 화분에도... 이쪽 옆 화분에도... 좁쌀만한 그 씨앗들이 튕기고 날아서 그렇게 그렇게 자리 잡았나보네요. 그렇게 자리 잡은 녀석들이 다섯 군데나 됩니다. 동백과 같이 있으니 또 웃자랄까 걱정인데 이 녀석들 뿌리에 힘 생기면 옮겨 심어서 야물딱지게 키우고 싶은데 괘안을지... 보라색일지 흰색일지는 피어봐야 알겠지만 무슨 색이든 그저 튼튼하게만 자라줬으면... 2006년 4월 6일 며칠 전부터 특이한 대궁이가 올라온다싶더니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불쑥 솟았습니다. 뭐꼬? 꽃망울인가? 아내를 불렀습니다. "봐라! 이기 꽃 맞나?" "맞네요. 그런데 왜 이렇게 기노?" "물을 마이 줘서 그런갑다." 2006년 4월 8일 10시 요 며칠 그의 안부가 궁금해서 밤늦게 들어와도 녀석들을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제 밤까지만 해도 희끄무레하던 녀석이 어제 아침 입술을 열기 시작하더니 낮 12시 불과 두시간만에 이렇게 피었습니다. 흰색만 피었습니다. 보라색은 아직 여린 모습이라 그 녀석은 또 언제쯤 꽃 피우려는지... 밤 10시 30분 어젯밤 들어오자마자 녀석부터 살펴보니 이렇게 오므라져있데요. 웬일이고? 원래 그런가? 기냥 이렇게 가삐는 기 아이가? 2006년 4월 9일 7시 40분 늦잠꾸러기인데도 궁금한 마음으로 일찍 일어났지요. 다시 펴지고 있더군요. 아~항! 제비꽃이 원래 그런갑다! 밤이면 오므린다는 걸 처음 알았지만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네요. 아시는 분 설명 좀 해주이소. 2006년 4월 9일 10시 다시 활짝 피었습니다. 어제 보다 더 곱게 피었습니다. 참 이쁩니다. 다른 녀석들도 곧 따라 피어나겠지요.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보였더니 "이 사진이 저 꽃인교? 사진빨이네..." 에구 무드 없는 할망... 이렇게 그들과의 일년이 지났습니다. 무사히 잘 넘겼습니다. 내 욕심으로 업어오긴 했지만 멀쩡한 넘 죽일 것 같아 딴엔 신경 썼는데 하지만 그 과잉보호가 이 녀석들에겐 독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가뭄에도 견디는 생들인데 삭풍도 버티는 생들인데 언 땅에서도 살아남을 생들인데 그러기에 그들이 대견한건데 바람 없고 햇살 따시고 물 걱정 없는 온실속의 그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본래의 꼴을 잊으려하네요. 바람 잦은 세상에선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 살도 근육도 없이 키만 껑충하니 이래서야 어디 제 몸인들 지탱하겠냐 싶고 솟대마냥 솟아오른 그 모습은 왠지 불안합니다. 엎드릴 때 엎드리고 웅크릴 때 웅크리고 숙일 때 숙여야 하거늘 세상 물정 모르는 온실 안 철부지를 바람 많은 들에라도 내보낸다면 십중팔구 꺾이겠지요? 험한 세파에 적응하려면 고생 좀 하겠지요? 좀은 안쓰럽더라도 엄하게 키울 걸 그랬나봅니다. 좀은 냉정하게 키울 걸 그랬나봅니다. 사람이나 풀이나... 이 녀석 하루종일 방글방글 웃더니 벌써 잠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쳤는지도 모르겠네요. 님들도 좋은 시간, 행복한 시간되이소...^_^ -06.04.09 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