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가는 길
가파른 언덕위로
갯바람에 떠밀려
사람들이 길을 내었다.
발길이 머문 자리에서
바람이 멎으면 지붕을 이었고
별빛이 또렷한 날엔
한 평도 안 되는 텃밭에 씨를 뿌렸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등대가 들어왔다.
사람들은 등대에 오르지만
묵호의 사람들만이
등대에 오르는 길을 알고 있다.
묵호의 사람들만이
등대로 향하는
길고 좁다란 고샅들의 사연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묵호등대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길목에 시비처럼 서 있는 글인데
누가 쓴 글인지는 안내가 없어 모르겠지만
내게는 참으로 와 닿는 글이라서
글과 바다와
산허리에 매달린 집과
거기에 이어진 좁은 비탈길을
번갈아 보았습니다.
등대에 대한 정확한 기억이 없어 찾아보니
60년 대 초에 세웠다내요.
그렇다면 내 소년시절에 세운 건데
내 기억으로는 처음 가본 것 같습니다.
명색이 고향인데 설마 처음이겠냐 싶기도 하지만
이 등대는 특별한 시설물이기보다는
늘 그 자리에 산의 일부처럼 서 있었기에
그 근방을 오르내리면서도
눈여겨 보지 않았었나 봅니다.
육지에서는 부러 쳐다볼 일 없는 것이라
관심이 덜 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듯 무심했어도
영동선 열차에 올라
도계, 황지, 철암 같은
태백산 줄기 오지마을을 휘돌다
북평항을 지나면서 만나는
묵호등대의 불빛에
휴~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그런 것이었고
바다에 나가면 어김없이 눈길이 가는 것이었지요.
바다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등대였습니다.
가파른 등대길
그 언저리에 사는 묵호사람들은
등대 앞에 서서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콩알만 한 고만고만한 배 중에서
지아비의 배를 용케 알아채고
가파른 언덕을 미끄러져
헐레벌떡 어판장으로 마중 갔다가
어획물과 어구를 이고
가파른 그 길을 또 헐떡이며 올랐지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저 아래 평지에 있는 우물까지
달도 지고 없는 첫새벽에 물 길러 다녔답니다.
비단 이곳만 가파른 건 아닙니다.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달리다가
작은 줄기 하나가 급하게 바다와 만나고
그 곳에 터를 잡다보니
산과 산 사이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항구에 접한 묵호는
대다수 그렇게 살았고울집 할매도 그렇게 처녀시절을 보냈는데
내게 시집와 젤 좋은 것이
가까이에 공동수도가 있는 거였답니다.
일제강점기 말엽
삼척지역의 무연탄을 나르기 위해
1941년에 개항되어 수탈의 전초기지가 된 묵호는
콘베어 벨트를 타고 배에 실리는 연탄이
바닷바람에 날려서
마을이고 항구고 온통 검게 물 들였으니
조선 순조 때 지어진 묵호(墨湖)라는 지명은
바다도 검고 물새도 검어서 지어졌다는데
설마, 한 세기 후의 일을 내다본 것은 아닐 텐데
어찌 그리 딱 맞게 지었을까 싶었지요.
내가 떠나던 76년까지
자그마치 5만의 인구가 북적대던
항구 특유의 활기찬 곳이었지만
연탄 수요도 줄고 어획량도 준 데다가
묵호와 북평을 합쳐 동해시가 되면서
3천명에 달하던 80년 된 묵호국민학교는
이리저리 갈라지고 떠나서
지금은 고작 200명도 안 되고
항구의 중심이던 묵호는
그 위상이 격하되어 동해시 묵호동이 되어
삶터 보다 관광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전히 푸른바다는 그 곁에 넘실대고
아기자기하고 예쁜 골목풍경이 아닌
그 바다와 이어진 진득한 삶의 풍경을
허름한 담장에 가감없이 살려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고 있음을 위안 삼았습니다.
그렇게 애 써준 고향 사람들이 고마웠네요.
아득히 뻗은 방파제를 보며
숨 한번 길게 들여마시고
내년을 기약하며 돌아섰습니다.
-14.09.10 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