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작은이야기

하트와 초콜렛

강 바람 2008. 2. 14. 23:05

 

한 사나이가 들어온다.

두어번 다녀간 사람인데

서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 알지 친분이 있는 사람은 아니고

가끔 들려서 나의 작업모습을 유심히 구경하다 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몇번 들락 거리더니 재료를 좀 팔라고 졸라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새와 새 머리, 기둥, 받침대를 서너 셋트 담아 줬다.

앞으로는 이런 부탁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그랬던 사람인데 오늘 또 같은 부탁을 한다.

내키지 않아서 거절했더니 막무가내로 매달린다.

무늬가 조각된 새와 

잘라서 다듬어 놓은 받침대와

껍질 벗기고 사포질해서 말려둔 으름덩굴이

그의 눈에는 그냥 나뭇가지로만 보이는지

도대체 염치라곤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실갱이 끝에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좋아서, 해보고 싶어서, 해보니 재미있어서라고 매달리니  

하는 짓은 맘에 들지 않지만 내가 너무 야박한 것 같아서

또 주섬주섬 챙겨서 들려 보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부탁하러 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그렇게 보내 놓고 있는데

이번엔 삼십대의 젊은 사람이 들어왔다.

몇번을 들렸는데 올때마다 없어서

오늘도 혹시나 하고 버스 두 정거장을 걸어서 왔단다.

적당히 한잔 하고 온 것 같은데 우선 공손함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팔기도 하십니까?

저건 얼마쯤 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묻는 품이, 우선은 기본이 돼 있는 듯 보인다.

가격을 말하니 가진 돈이 모자라서 안되겠다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데, 또 맴이 그렇다.

얼마쯤 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지갑을 까뒤집는데

잔돈과 함께 꺼내 놓은 돈이 가격의 반값 정도다.

그 속에는 오천원짜리 도서상품권을 포함해서...

줬다.

물건도 임자가 있는가보다 싶어서...

 

그럭저럭 놀다가 버스를 타고 오는데

자물통을 채웠는지 안 채웠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건망증인지 뭔지...

90%는 채웠다라고 생각되는데 10%불확실성이 자꾸 가로막는다.

달고기님한테 전화해서 봐달라고 할까 싶기도 했지만

번거로울 것 같고, 환승하면 버스비도 안 드니 고마 내가 확인하자.

그래야 오늘 저녁이 편하지 싶어서...

다음 정거장에서 바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고 돌아갈 버스에 타고는 교통카드를 대는데

기계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환승하면 "환승입니다"라고 하는데 감사하다니?

그라몬 앞차 내리면서 환승체크를 안했단 말인가?

이거 확실이 건망증이 생긴게 아닌가 싶으니

90%의 확신이 50%쯤으로 내려온다.

한 정거장이니 금방 도착했다.

가보니...역시 야물딱지게 잘 채워져 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버스가 접촉사고를 일으켰다.

시간에 �겼던지 무리하게 파고들고 빠져 나오고를 반복하더니

기어이 다른 버스의 백미러를 치고 나가고

퇴근시간 길 한복판에 버스 두대가 막고 있으니 뒷차는 연신 빵빵거리고...

내가 볼땐 우리차가 잘못한 것 같았는데 목소리는 우리차 기사가 더 컸다.

결국, 목소리 큰 우리차 기사가 이겼다.

얌전한 저쪽 기사는 그냥 허허 웃으며 서 있고...

 

그렇게 도착해서 엘리베이트 스위치를 눌러 놓고 있는데

아들 또래의 젊은이가 바쁘게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오더니

앞에선 나를 밀치듯 하고는 엘리베이터 문 앞으로 바짝 닥아선다.

-이런 버르장머리 하고는...쯧- 속으로 혀를 차며 탔는데

그 친구가 7층을 누른다.

순간, 미운 생각이 들어서 나도 6층을 눌렀다.

보통, 다른 사람이 5층을 누르면 그냥 같이 내려서

계단 몇개 올라가면 되니 굳이 6층을 누를 필요가 없었고

누군가 7층을 누를 경우 

물건을 들지 않은 한 별도로 6층을 누르지 않고

7층까지 같이가서 계단으로 내려오고 마는데

젊은 친구의 행동이 배려할 마음을 싹 가시게 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꼬맹이 손녀가 달려나오며

"다녀오셨습니까?" 외침과 함께 넙죽 절을 하는데

기웃둥하더니 옆으로 쓰러진다.

급하게 달려나오는 그대로 절을 하려니 제 몸을 가누지 못한 거다.

녀석이 멋적은 표정과 울듯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반쯤 누워 있기에

"우와~~우리 연우 새로운 절을 배웠네?" 하며 웃으니

그제서야 녀석도 웃으며 일어서서는

다시 절하고 일부러 넘어지기를 서너번이나 반복하며 연신 깔깔 웃더니

초록색 색종이로 하트를 만들어 할아버지꺼라며 밥상에 올려 놓는다.

오늘 발렌타인데이인데 초콜렛은 안주냐고,

할아버지도 남자라고 했더니 초콜렛을 하나 꺼내 주기에

이왕이면 사랑합니다 말하면서 주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멋적었는지 잠시 생각한 뒤에 한마디 한다.

"그래서 아까 하트 줬잖아요..."

녀석의 잔머리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녀석도 어느새 잠이 들고 할매도 자러 가고

그렇게

하트와 초코렛을 옆에 두고 웃음으로 오늘 하루를 마감한다.

 

-08.0214 강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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