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작은이야기

비비추가 사는 곳

강 바람 2008. 2. 18. 14:19

기어이 길을 나섰습니다.

눈산이 보고잡네 어쩌네 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하필이면 제일 춥다는 날에 집을 나섰습니다.

철 없다 싶지만

어쩌면 그 철없음을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한풍이 계곡을 훑고 내려와 고즈넉한 산사를 얼리는데

산사는 흰 눈 이고도 낯색 한번 변하지 않건만

속세의 철부지는 손바닥만한 잘난 얼굴 감싸기에 여념 없었네요.

 

아내와 조카를 앞세우고 산을 올랐습니다.

 

산허리에 늘어선 행열에 끼어

터벅터벅 가파른 계단을 한발 또 한발 내딛는데

등 굽어, 세발로 기어 오르는 노파의 턱에 찬 숨소리를 들으며

저 꼭대기에 있는 그 무엇이 노파에게 어떤 의미일지가 궁금해집디다.

 

그들이 보고자 한 것은 무엇이고

보기는 했는지,

아니면 오늘도 빈손으로 돌아 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목적과는 달리

확 트인 꼭대기에서 설산 한번 바라볼 욕심으로

헉헉대며 오른 그곳, 

칼바람이 매섭게 목덜미를 파고 드는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저곳과

건너다 본 저 산이 내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 산들은 그냥 핑계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보려는 게 아니라 느끼려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선 자리에서 사방을 한바퀴 휘 둘러 봤을 뿐.

무엇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했는데 

목적을 이룬 두 아낙은 하산을 조릅니다.

보고픈게 아직 많은데,

조금 더 서있고 싶었는데

명색이 싸나이가 돼서 둘만 내려보낼 수 없어 

가파른 계단을 털레털레 내려왔습니다.

오르는 사람들의 턱에 찬 숨소리를 들으며 절집 마당에 도착해서는

두 사람만 내려 보내고 기어이 샛길로 빠져 다시 올랐습니다.

아무래도 아쉬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요.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적없는 산길.

딱, 사람 발자국 만큼만 녹은 비탈길...

그리고 바람소리와 비집고 들어온 햇살...

그 속에서 나를 잊고 거닐 수 있는 무심함이

정작 내가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곧게 선 나무들과

희끗희끗한 눈과

아련한 능선들...

 

젊은 나무들의 하늘 찌르는 기상이 부러운만큼

굽은 등으로 비탈에 선 노송의 처연함에 발길을 멈추고

들쑥날쑥한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이 산이 높네 저 산이 높네 혼자 다투어봅니다.

정작,

산은 제 키를 알지도, 알려하지도 않는데...

 

곧은 나무에서 느끼던 긴장감은

길게 누운 그들의 그림자에서 옅어집니다.

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땅의 굴곡을 거부하지 않고 어디든 편하게 드리운 그림자들.  

어쩌면,

남보다 한발 더 솟으려는 다툼속의 본성 또한 이와 같지는 않을지...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지만

이 녀석은 무엇을 남기려 눈을 침대삼아 누웠을까요?

모르긴 해도 이녀석의 염원은 오직 하나,

가죽도 허명도 아닌 생명의 이음이 아닐지요.

어서 눈이 녹고 땅 기운 솟아

제 품에 간직한 생명을 온전히 이어주고자함 외에

호랑이든 솔방울이든

그들에게 무슨 욕심이 있었겠습니까.

가죽을 남긴 것도 호랑이가 아닌, 사람의 욕심인듯합니다.

 

어느 신심 깊은 사람의 기도처인지

아니면, 산불 예방이라도 하려는지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내려오다 보니

작은 움막에 오후의 햇살이 밝게 내려 앉았습니다.

물론 인기척 없는 걸 보니 비었는가 봅니다만,

그 흔적만으로도 반가웠네요.

그렇게 두어시간 서성거리다 내려와

 

절집에서 관리하는

"야생화전시장" 둘러 봤습니다.

많은 꽃들이, 풀들이 이름뿐인 온실에 진열돼 있는데

냉냉한 기운으로 줄기만 앙상한 가운데

다만, 이녀석 하나만 잔형을 유지하고 있더군요.

팻말에 적힌 이름을 보니 "비비추"라 적혔는데

이름이사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언제 까지 기억할지는 저 자신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앞으로 "비비추"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날, 그 산사의 풍경이 떠오르리라 여겨지니

작은 몸속에 또 하나의 산을 들여 앉혔고

그 한 귀퉁이에 또 한송이의 꽃을 심은 셈입니다.

하지만, 내 속의 비비추는

평생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피어 있을지모르겠습니다.

지금 저모습처럼...

    

시린 발 달래볼 요량으로 제자리에서 동동 거리고

언 손 맞잡고 불나도록 비비면서도 그지없이 편했던 풍경들,

이제 그들을 뒤로 하고 

잠시 잊고 있었던 세상 그 가운데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방석 하나만큼의 자리만 허용된,

움치고 뛸 여력도 없는 그 좁은 자리에서

육신의 고통에 비비꼬다보니

발 뻗을 자리 눈치 보고 한치라도 더 넓히고 싶은 욕심에

들은 법문이 마음은 고사하고 귀에 들어올리 없고

무엇을 염원했는지도 기억되지 않으니

밤새도록 떠나지 않는 바램은 오직 하나

"어서 날이 샜으면..." 싶을 뿐...

동도 트기전에 짐 꾸려 들쳐 업은 채

뱃속에 시락국 한 사발 우겨넣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돌아본 무박2일은

그 밤 그 자리를 감당하기엔

너무 허약한 나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고

육신의 고통은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 잊을 수 있었지만

감히, 하룻밤쯤이야 했던 만용은

엿세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부끄럽습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느낄 수 있었으니

하룻밤 뜬눈으로 새운 댓가치고는

제법 큰걸 챙겼다는 생각도 들고요.

 

남녘이라서 그렇겠지만

어제는 들에 핀 보랏빛 주름꽃을 보았습니다.

봄이 멀지 않았나봅니다...^_^

 

-08.02.18 강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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