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나무이야기

가지치기

강 바람 2011. 12. 18. 21:11

   

겨울인데도

베란다의 영산홍은 여전히 파랗습니다.

저 화분에 앉은 지 어언 이십년을 훌쩍 넘겼는데

너무 웃자라서 엊그제 싹둑 잘라버렸네요.

추운데 너무 많이 자른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긴 합니다만

운에 맡기기로 하고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다가

그냥 보내기 서운해서 가지 몇 개를 추렸습니다.

이렇게라도 하면 조금 덜 미안치 싶어서요.

   

 

서너 해 전에 경주 드리머님에게 얻은

대추나무 받침대를 꺼내 놓고 앉았습니다.

색깔과 모양과 숭숭 뚫린 벌레구멍까지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 녀석이라 

그동안 그릇 받침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잘라낸 가지를 보면서

얼핏 이 녀석이 생각나서 시작한 겁니다.

      

 

일단 가지를 세워 봅니다.

앞에 세울까?

뒤에 세울까?

오른쪽에??

아님 왼쪽에??

여기저기 세워보다가 건너편 왼쪽으로 정했습니다.

나무의 허전한 부분엔 잔가지로 접목(?)하고

대나무 핀을 꽂아 세웠습니다.

이동할 때를 대비해서 본드는 사용하지 않고요.

 

 

 

벤치를 하나 놨습니다.

나무를 크게 보이려고 아주 조그맣게 만들었는데

너무 작다 싶어서 조금 크게 만들었습니다.

여름날 그늘이 그리울 때 쉬어갈 수 있게요.

혼자라면 벌렁 누울 수도 있고

여럿이라면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고요.

 

 

대충 이런 모습입니다.

일테면 동네 어귀의 정자나무를 연상했는데

이 또한 저의 그리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풍경으로 만족하려했지만

그래도 나무에 새 몇 마리 정도는 있는 게 좋겠지요?

깊게 파인 썩은 자리는 강과 연못이 되고

벌어진 틈은 실개천이라 우기렵니다.  

 

 

이것 또한 찻잔 받침으로 쓸 것이기에

찻자리 동무로 어린 새 두 마리를 앉히고

솟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높게 한 마리 얹었네요.

 

 

이렇게 마무리 했습니다.

소재 : 대추나무 받침 / 영산홍 가지 / 떼죽나무 새

규격 : 받침(가로 400mm x 세로 160mm) / 가지 높이 220mm  / 새 길이 35mm

 

가지치기...

그게 비단 나무뿐이겠습니까.

저도 가끔은 기억의 가지치기를 하려하지만

그게 맘대로 되질 않네요.

좋은 기억은 오래 갔으면 싶고

나쁜 기억은 퍼떡 지워졌으면 싶은데

꼭 기억해야 할 일은 깜빡깜빡하고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시시콜콜한 일은

오히려 더 오래 머물며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드나드니

그것들이 때론 긴 밤을 하얗게 새우게도 하고

더러는 혼나간 사람처럼 멍하게도 합니다.

 

며칠 전 새벽에 길 나서다가

낙엽을 쓸어내는 미화원을 봤습니다.

주황색 가로등 아래 노랗게 쌓인 은행잎을

구부정한 자세로 쓸어내는 무심한 모습...

차창 너머로 스치듯 지나간 짧은 그 풍경이  

어째서 며칠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은행잎과 가로등의 노란 색깔 때문인지도 모르고

휘어진 그의 등에서 내 모습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떠올리면 따뜻해지는 풍경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기억들이 오래 머물기를 소망합니다.

 

저녁 먹는 중에 아내가 탄식조로 중얼거립니다.

"세월 참 빠르네요..."

"뭔 걱정이가...또 새로운 한해를 받는데..."

"벌써 육십 일곱인교?"

"내 나이를 와 당신이 들먹이노? 지꺼나 챙기지...ㅎㅎ"

"칠십이 낼모레네..."

"걱정마라, 서른은 서른의 삶이 있고 칠십은 칠십의 삶이 있는 거지...

  사는 동안 뒤뚱거리지나 않으면 고마운 일이지..."

내년에도 같은 마음이기를 소망합니다.

 

금년엔

지난 몇 년 중에서 그래도 덜 게으른 한해였습니다.

감히, 부지런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성실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지난 이맘 때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까맣게 잊고 살았지만

돌아보니 작년보다 나쁘진 않았습니다.

무엇이 나아졌다기보다

기대치가 줄었기때문인지도 모르니

내년에도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소망하지만

차라리 이 소망마저 잊히기를 바랍니다.

그게 나이 값인지도 모르겠네요.

 

며칠 남지 않은 이 해 잘 마무리 하시고

내년엔 더욱 알찬 한해가 되시길 바라며

한해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송년주, 망년주 아껴 드시고 건강들 하시고요.

님들, 고마웠습니다...^^

 

-11.12.18 강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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